Dance Film <Animus>(DOLL - Archetype - Animus), 최호종
<Animus> 시리즈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트라우마다. 이는 총 4개의 영상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의미하는 약어 PTSD의 문자 순으로 연결되어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첫 번째 작품 'DOLL'에서 무용수는 트라우마 그 자체와 트라우마의 치유과정을 형상화한다. 여기서 토끼는 토끼굴을 통해 그를 '이상한 나라'로 이끈다. 그 나라는 일종의 꿈인데, 꿈은 프로이트나 융이 말했듯 무의식을 대변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트라우마는 그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은폐되어 있다.
안무가는 이 감추어진 무의식을 들춰내기 위해서 심리상담의 장치를 도입해온다. 이른바 인형치료인 것인데, 이는 내담자가 인형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무의식 세계 내지 트라우마를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언어가 아닌 인형으로 그것을 전함으로써 방어기제나 단어의 한계로 드러내기 힘든 속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 그 장점이 있다.
무용수는 인형과 마주한다. 그리고 피부색 천을 뒤집어씀으로써 무용수가 그 인형으로 변양되고, 그는 트라우마를 몸짓한다. 처음에는 그 동작에서 조심스러움이 엿보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음악이 치달을 수록 내적 고통이 격렬하게 요동친다. 그리고 이 과정 끝에 정신적 외상에서 자유로워지고, 그것이 감싸 안아지며 치유된다.
두 번째 작품 'Archetype'은 전형적인 또는 대표적인 유형을 의미한다. 문학이나 철학용어로도 많이 사용되지만, 창작자가 칼 융의 'Animus'의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비추어 보아 집단적 무의식의 표본을 뜻하는 것 같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트라우마이므로 트라우마의 전형적인 형상이 모방대상이다.
첫 번째 영상이 꿈속이라면, 두 번째 영상은 꿈에서 깬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트라우마의 모습이 형상화된다.
트라우마는 그 굴레 속에서 반복되며 문득문득 튀어 오른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이를 보여주는 동작들도 그러한 특징과 유사하다. 원을 그리는 팔, 빙글빙글 돌아가는 몸통, 툭툭 끊어지는 손짓과 그것들의 반복 등이 그러하다. 특히 5:03 의 동작은 "기준점 없는 도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도태는 우리가 트라우마를 직시하기 전의 상태인 것 같다.
더불어 밴드 혁오의 노래 'Hey sun'은 앞서 말한 주제를 뒷받침해준다. "아침 해는 원래대로 되돌아간다(Morning sun set back to normal)", "여기서 그 끝은 또 다른 끝의 시작점이다(The end is here another beginning of the end)"와 같은 가사와 멜로디 및 비트의 단순한 반복은 마치 언제라도 다시금 떠오르는 상처, 즉 트라우마와도 같다.
후반부의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는 트라우마의 굴레 속에서 느끼는 어지러움과 피로, 고갈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 주변에서 뛰어다니는 토끼들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꿈속 세계로 데려갈 안내원이다. 치유의 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따라가느냐 따라가지 않느냐는 선택에 달린 게 아닐까?
마지막 작품은 바로 전체시리즈의 제목인 'Animus'이다. 지금까지 트라우마 그 자체와 치유, 그리고 그 특징인 반복성을 거쳐 이 자리에 도달했다. 여기서는 트라우마의 구체적인 예시가 등장한다. "여성의 무의식 속 남성적 요소(칼 융의 심리학 개념인 Animus이며, 이와 대조되는 것으로 Anima가 있음)", 그리고 그 Animus의 일부분인 "사회적 억압을 통해 드러나는 여성상이 동반하는 트라우마(안무가의 가설)"가 그것이다. 시대적 억압인 남성에 의한 모든 폭력적인 행위 등에 의해서 각인된 트라우마가 이에 속한다. 또한 화면 속 두 의자는 여성의 내면 안에 여성성과 아니무스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영상은 남자 무용수와 함께 시작된다. 아니무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질 수 있는데, 폭력과 억압의 반대급부로서 공격적인 성향의 부정적 아니무스와 본래적 여성성과 조화를 이루는 긍정적 아니무스가 있다. 영적 화신이나 철학적 종교적 견해를 대변하는 후자를 통해 여성은 정신의 전체성을 획득하고 안정적인 상태가 된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균형 잡힌 인상을 주는 남성의 동작이 바로 긍정적인 아니무스를 체화한다.
10:01 부분의 손가락 - 손바닥 - 손의 맞잡힘을 통해 이제 여성성 또는 여성인 주체로서 여자 무용수가 등장한다. 앞서 말한 그 이어짐의 몸짓이 그 둘이 나뉘어있는 동시에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 번째 무용수의 동작은 긍정적 아니무스를 통해서 억압과 폭력의 기억이 해소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닿았다가 떨어지길 되풀이하는 손짓, 강압적으로 붙잡으려 하는 한쪽 손과 이를 뿌리치는 반대편 손, 그리고 이 속에서 갈등하지만 끝끝내 주체를 감싸 안아주게 된다.
"네가 내 말을 잘못 들은 것 같아(I think you heard me wrong)", "그런 식으로 울지마(don't cry that way)", "내가 사용한 말은 너무 쎄고 불안정해(the words i use are way too strong unstable)", "너의 미소를 보고 싶어(i wanna see your smile)" 등 갈등과 어긋남, 화해와 위로를 이야기하는 배경음악 Rhye의 노래 'Please'의 가사도 위 무용과 잘 어울린다. 참고로 원곡의 뮤직비디오도 무용예술 장르인데, 본 작품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최호종의 댄스필름 시리즈 <Animus>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고 형언하기 어려운 무의식과 트라우마의 영역을 무용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여러 상징적인 장치들과 그 의미를 풍부하게 담아내고자 했다. 무용의 효용성에 의문을 갖고 있던 내게 무용의 가치와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 수려한 외모에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얼굴을 가리고, 온전히 무용의 본질인 몸과 움직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 상처의 위로에 집중하고자 한 그의 연출의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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